중국 일본 관광

중국 남경 대학살 기념관(南京大屠杀纪念馆)

신정동 홍프로 2024. 6. 30. 11:50

중국 남경 대학살 기념관(南京大屠杀纪念馆)

 1937년 중일 전쟁 당시 일본군이 난징에 진입해 난징 주변과 시내로 도망친 중 국군 잔당을

수색 한다는 명분으로 6주 동안 중 국군 포로 들과 난징 시민 들을 무참히 학살한 사건. 지금

까지도 중일 관계에 심대한 악 영향을 끼치는 사건 중 하나로 학살의 정확한 규모는 불명확

하지만 전후 일부 유골 매립지를 근거로 든 연구 결과가 수 만명 단위 이하로 내려가는 경우는

드문 것으로 볼 때 최소 수만 명 이상이 희생 당한 것으로 추정 된다. 극동국제 재판 판결에

따르면 최소가 12만 명 이며 최대 추정 숫자는 약 35만명 정도다.일본 국내 학계에선

10-20만명 정도가 중론이며 프랑스 에선 한 학자가 약 9만 명 정도가 살해 당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다만 여기서 9-20만명은 난징과 주변 변두리 정도에 한정한 것이며 주변 도시까지

포함한 것은 아니다. 당연 하지만 20~30만명은 난징 '시내' 학살 숫자가 아닌 난징 '근교와

진격 도중' 숫자도 포함한 것이며 난징 한 곳에서만 저렇게 나오기는 힘들다. 난징 자체도

중일 전쟁 이전의 역사 적으로 중화권끼리 전쟁하다가 난징에 진입해서 학살을 자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1937년 일본군이 난징으로 진격하는 동안 중화 민국 정부는 난징을 포기하고

충칭 (중경)을 임시 수도로 정한다고 발표한다.그러나 중공군 사령관 탄셩즈(唐生智) 장군은

결사 항전을 주장 했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수도를 지키겠다.12월 10일 일본군은 중공군에

항복하지 않으면 피의 양쯔강을 만들겠다고 최후 통첩을 한다 결국 중공군운 끝까지 투항을

거부 했고 일본군은 전면 적인 공격에 들어 간다.그 무렵 난징이 함락 되기 직전 전날 결사

항전을 주장하던 중궁군 사령관 탕셩즈는 자신의 휘하 부대와 난징성에 고립된 시민들을

뒤로 한채 양쯔간 가장 먼저 건너 도망 했다  여기서 피난 가지도 못한  채 남아있더 50~0만의

난징 시만들과 군인들은 공항 상태속에서 4~6 주간 일본군에 의해 처참한 학살을 당했다.

전시관 벽에는 30만명이 처형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기념관을 돌아보는 동안 많은 자료가

있는 전시장 내부는 촬영 금지 구역이라 촬영을 못 하고 외부 사진만 찍을 수 있었다.우리나라

독립기념관을 돌아 보는것 처럼 일본군의 악란한 비 인간적인 야만 적인 행동에 분노와 울분을

다시 한번 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