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 안탈리아 주 지중해 연안
BC 2세기에 페르가뭄의 왕 아탈루스 2세가 세운 해항에서 비롯되었으며, 그의 후계자 아탈루스
3세가 로마에 유증(遺贈)했다. 사도 바울로와 바르나바가 선교활동을 위해 안티오크로 떠날 때
바로 이 항구를 이용했다.3개의 아치로 된 대리석 대문인 '하드리아누스 문'은 130년에 이곳을
방문한 하드리아누스를 기념하여 지어진 것이다. 중세에는 비잔틴의 요새였으며 십자군 원정
때에는 팔레스타인으로 떠나는 군대의 주요승선지였다.1207년 셀주크 튀르크의 통치자 카이
쿠스라우에게 점령되었고, 그후 얼마 안 되어 일대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겸 항구가 되었다.
1391년에 오스만 제국의 술탄 바예지드 1세에게 처음으로 점령되었으나, 오스만 제국으로의
합병은 티무르의 침략으로 야기된 혼란으로 인해 15세기 후반까지 지연되었다.제1차 세계대전중
오스만 제국의 전후 분할을 위해 이탈리아·프랑스·영국이 맺은 1917년의 3국 협정에서 이탈리아는
안탈리아와 그 배후지의 영유권을 요구했다. 이탈리아 군대가 1919년 이곳을 점령했으나 1921년
7월 튀르크의 국민군에게 쫓겨났다.기후가 아열대성으로 따뜻한데다가 근처에 고대 유적지가
많은 관계로 튀르키예령 리비에라의 주요 관광 휴양지가 되었다.부두가 내려다보이는 낮은
절벽 위에 있는 옛 도시는 로마·비잔틴·셀주크 시대에 개축되었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유명한 유적으로는 한 때 등대로 사용된 것으로 짐작되는 옛 탑과 1250년에 세워진 셀주크의
종교대학 겸 모스크가 있다.비잔틴 시대에는 교회였다가 셀주크 시대에는 모스크로 바뀐
이이블리미나레의 일부가 지금은 지역고고학 박물관으로 쓰이는데, 이곳에는 인근 지역에서
발굴된 히타이트, 그리스·로마, 비잔틴, 튀르크의 유물들이 소장되어 있다.
옛날의 성곽 도시 안은 현제 사람이 살지않는 빈집들이 많다.
눈처럼 하얀 석회 층으로 유명한 도시.마을 뒷산을 감싸고 있는 석회석 층은
목화솜이 만들어낸 성 같다고 해서 파묵깔레가 되었다고 되었다고 합니다.
터키 콘야 술탄 하느(거상들의 숙소) : 실크로드의 종착역인 이스탄불까지 많은 대상들이
카라반을 이용 쉬어가는 거상들의 숙소, 이속에는 장거리 여행에 병든 낙타들을 치료하는
낙타 병원도 있다.
셀수스 도서관, 대리석 거리 끝에 위치한 아름다운 건물로 에베소 의 상징 이기도 하다.
정면에는 네명의 여인 상이 있는대이는 각각 지혜, 덕성, 학문, 지식을 상징한나.
그 시대의 화장실로 밑에는 물이 계속 흐르고 있어 자동 세척이 된다.
트로이 목마 모형, 그때당시의 성곽들이 남아 있다. 1998년 유네스코 세계 무놔 유산이 되었다.
트로이 지역의 히실리크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트로이는 기원전 4천년전 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술탄 아흐멧 광장이라 불리는 히포드럼(전차 경기장)은 도시의 심장부 로 콘스탄 티노플의
점령한 로마 왕제 셉티뭇 세베루의 통치기간중 203년에 건설이 시작 되어 콘그탄 티누스
대재에 의해 더 거대 하게 만들었으나 지금은 그 형체를 전혀 볼수 없다.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이스탄불 대교. 터키는 현제 3%가 유럽에 속래 있고, 97%가
아시아에 속해 있다.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보스포리스 해협.
세계를 지배하던 3대 강국인 로마, 비잔틴,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기도 했었던 이스탄불은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1200만명의 인구가 살아가고 있다. 터키의 수도는 인구 400만명의 계획도시 앙카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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