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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프로 계시판

중국 베이징시 북 서쪽 하이텬구 이화원(頤和園)

by 신정동 홍프로 2024. 10. 6.

중국 베이징시 북 서쪽 하이텬구 이화원(頤和園)

중국 베이징시북서쪽 하이텬구에 위치한 황실 원림. 총면적 2.9 km²에 달하며 베이징에서 현존

하는 황실 원림 중 건축규모가 제일 크고 비교적 온전하게 보전되었다. 중국 고전 원림의 본보기

이기도 한 이화원은 높이 60m인 만수산(萬壽山)과 면적 2.2 km²인 쿤밍호(昆明湖)가 있다
만수산은 원래 이름은 옹산(瓮山)인데,베이징 서산(西山)의 지맥으로 처음에는 높이가 60 m도

안 되는 작은 언덕이었다. 옥천산(玉泉山)의 샘물이 흘러내려 옹산 앞에서 호수를 이루었는데,

이 호수가 당시 금나라의 수도인 중도(中都) 서쪽에 위치해 있어 서호(西湖)라고 불렀다. 1153년

근나라 해릉양왕이 이곳 산기슭에 행궁을 짓기 시작했고,원나라 쿠빌라이 칸은 대도(大都)로

천도하면서 대운하를 통한 조운을 원활히 하고 궁중의 용수를 확보할 목적으로, 1262년과

1290년 두 차례에 걸쳐 도수감 곽수경에게 명해 옥천산의 샘물을 옹산 기슭에 막아 물을 끌어

들여 서호를 준설 확대해 수역을 크게 늘리도록 했다. 이때 서호에서 파낸 흙은 옹산에 쌓아

놓게 해 원래보다 크게 높아졌다.

이화원의 정문인 동궁문. 황제나 황후가 출입하던 가운데 문은 어로문(御路門)이라고 불렸다.

문 위에 걸린 '이화원' 세 글자의 편액은 광서제의 친필이다.

 

이화문 앞 청동사자. 왼쪽 앞발로 여의주를 잡고 있으면 숫사자,

오른쪽 앞발로 새끼를 잡고 있으면 암사자라고 한다.

 

인수전의 정문인 인수문. 이화원의 이중 궁문으로 편액은 한자와 만주어로 적혀 있다.

인수전 앞뜰의 태호석. 생김새가 노수성(老壽星)을 닮았다 해서 수성석(壽星石)이라 부른다.

인수전 앞마당의 사슴의 뿔, 용의 머리, 사자의 갈기, 용의 비늘몸통, 소의 발굽을 한 청동

기린상은 상서로운 짐승으로 사악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한다.

 

인수전 안에는 옥좌, 병풍, 공작 깃털로 만든 장식용 부채, 향로, 크레인 모양의 등이

그대로 남아 있고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전구가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인수전

인수전 앞에는 건륭제 때 청동으로 주조한 봉황, 용, 항아리, 향로가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데,

중국 고대의 예제에 따르면 용은 제왕을 상징하므로 가운데에 놓여야 하지만,서태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부터는 용을 밀어내고 봉황을 가운데에 놓아 황제보다 우월한 서태후의 권력을 과시했다.

 

옥란당(玉澜堂) 정문인 옥란문(玉澜門)

옥란당은 중국 전통의 사합원식 건물로 건륭제가 처음 지어 국사를 처리하던 곳이었으나, 1860년

연합군에 의해 소실되었다가 1892년에 다시 지었다. 광서제는 청나라의 근대화와 입헌군주제개헌을

위한 변법유신운동이 서태후를 위시한 수구파에 의해 좌절된후, 모든 권력을 박탈당하고 옥란당에

유폐되었다가 10년 후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동쪽 건물은 광서황제가 식사를 하던 하분실(霞芬室)

 

의운관(宜蕓館)의 출입문인 의운문(宜蕓門)

의운관(宜蕓館)

건륭제 때는 도서를 보관하던 장서처였다가 광서제 때 중건하면서 광서제의 아내 효정경황후의

처소가 되었다. 무술정변 이후 옥란당과 이어진 통로는 벽돌 담장으로 막혀버렸다.

 

 

 

 

낙수당의 정문인 수목자친(水木自親)은 물가 앞에 부두가 있어 서태후가 수로(水路)로

이화원에 올때에는 이곳을 통해 뭍으로 올라 낙수당으로 들어 갔다고 한다.

 

 

일명 패가석(敗家石)이라고 불리우는 자연석은 명나라 관료 미만종이 북경의 망산에서 영지모양과

비슷한 푸르게 빛나는 돌을 발견하여 자신의 정원으로 옮기던 도중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교외에

버렸다 한다. 그 후에 건륭제가 이 돌을 거액을 들여옮기고 청지수(靑芝岫)란 이름을 지었다.

 

낙수당 본채는 서태후가 일상적으로 활동하던 장소이고 서난각은 침실이며 동난각은 탈의실이다.

장랑(長廊)의 출입문인 요월문(邀月門)

장랑은 건륭제 15년에 건립하였고 동쪽의 요월문에서 서쪽의 석장정(石丈亭) 까지 273칸 728m 이다.

 

장랑의 천장과 기둥 사이를 이어주는 공간에 14,000여 폭의 전통색채화, 풍경화, 산수화,

인물화, 화조도 등 역사와 신화, 자연과 전설을 담은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장랑 중간 중간에는 유가(留佳), 기란(寄瀾), 추수(秋水), 청요(請遙)라는 4개의 8각

처마정자가 있는데, 춘, 하, 추, 동 사계절을 뜻하여 지은 것이라 한다

 

난간 문설주 위에는 서유기, 삼국지연의 등의 고전문학과 중국의 역사, 전설, 신화 등

상고시대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 5천여 년을 포괄하고 있다.

 

그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는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 낚시하는 강태공,호랑이를 때려잡는 무송 등이 있다.

기둥에는 항조우의 서호, 각종 나무와 꽃이 어우러진 풍경, 새와 꽃, 강남의 풍경 등이 그려져 있다.

운휘옥우 패방(雲輝玉宇 牌坊)

 

 

 

1886년 서태후가 사찰 대신 궁전건물을 짓고, 자신의 생일에 축하 인사를

하러 온 문무백관과 황족을 맞이하는 장소로 사용했다.

 

불향각(佛香閣)

 

 

 

곤명호는 항저우의 서호를 닮은 이화원 최대의 호수이다. 둘레는 6.4km, 호수의 면적은

220만㎡로, 이화원 총면적인 290만㎡의 4분의 3을 차지한다.

 

 

 

 

석가루(夕佳樓)

곤명호는 원래 원나라와 명나라 때 물 저장고로 이용하던 서호(西湖)를 건륭제가 확장공사를

해 조성했다. 호수에서 나온 흙으로는 만수산을 더 높게 쌓았다.

 

만수산의 불향각

 

 

문창각(文昌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