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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프로 계시판

베트남 다낭 역사의 도시 후에 후에성 왕궁

by 신정동 홍프로 2024. 12. 8.

베트남 다낭 역사의 도시 후에 후에성 왕궁

일찍이 삼국지 에도 등장하는 도시로 교주에 소속되어 후한 최남단인 일남(日南)군 일대에

속했다. 이후 참파인들이 거주하다가 14세기에 베트남 왕조의 세력권으로 들어왔다.응우옌

가문의 주 본거지로 옛 이름은 푸쑤언(Phú Xuân, 富春)이었고, 1802년부터 1945년까지

베트남(완조)의 수도였다. 프랑스의 식민지배 시기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인 중부

(안남)의 수도였고[4] 이전에 수도 기능을 하던 구시가지 외에 신시가지가 생겨나는 등

발전했다.베트남 공화국시대에는 직할시이자 베트남 군사 분계선에서 고작 100km 떨어져

있는 최북단 접경도시이기도 했다.또한 응오딘지엠 정권 당시 반정부 시위가 아주 격렬하게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며, 그 때문인지 소신공양을 한 스님인 틱광둑의 심장이 보관된 곳이기도

하다. 틱광둑의 소신공양 이후 반지엠정권 불교도들이 시위가 남베트남에서 격렬히 일어났던

곳이다. 그리고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대규모 지상병력을 파병하던 시점에도 남베트남 군부와

불교도가 연합하여 일으킨 봉기가 발생한 곳이기도 하며, 1966년 당시 남베트남의 국가원수

였던 응우옌반티에우 주석과 남베트남의 수상이었던 응우옌까오기 가 병력을 보내 봉기한

남베트남군을 진압한 곳이기도 하다.베트남 전쟁 당시에는 MACV(주베트남 미국 사령부)와

남 베트남군의 1사단 본부가 위치한 곳이었고, 1968년 구정 공세 때는 베트콩과 베트민군이

1개월간이나 시를 장악하여 저항했다. 주로 전투는 북쪽의 왕궁이 있는 구시가지에서 진행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 의해 후에 대학살이 일어난 도시다.베트남전쟁

최악의 학살로 불리는 후에 대학살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 의해 학자, 지식인, 정치인,

공무원을 포함한 많은 민간인들이 학살 당한 사건이며 그 희생자는 최소 수백명에서 수천명에

달한다.구정 대공세 당시 전투에 투입된 미 해병대가 시내 대부분을 탈환했을 때에도 겹겹으로

방어선을 만들면서 결사항전했기에 미군은 B-52를 포함한 대규모 융단폭격과 해군의 함포사격

까지 동원해야 했다. 이로 인해 민간인 사망자 급격히 증가했다. 그 때문에 노엄 촘스키의 경우

대다수의 민간인 사망자가 베트민군이 아닌 미군의 화력에 의해 발생했다고 여러 저서들에서

주장했을 정도 이때 미군의 무차별 함포사격으로 황제가 머물던 서양식 궁전 건중루를 비롯한

후에 황궁의 여러 건물들이 파괴되었고 90년대부터 베트남 정부에서 복원 공사를 진행 중에 있다.

결국 미 해병대의 치열한 혈전을 치른 끝에 베트민군이 물러나게 되고[8] 1973년 이후 미군이

철수하고 남베트남과의 휴전협정이 파기되면서 1975년 북베트남이 다시 점령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