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 그림
고흐는 10여 년간 40점 이상의 자화상을 그렸다. 17세기의 렘브란트 역시 자화상을 많이 남긴
것으로 유명한데, 이들은 둘 다 같은 나라(네덜란드) 출신이라는 것 이외에도 ‘불우한 화가’라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렘브란트는 한때 당대 최고 화가로서의 영광을 한 몸에 누렸지만 자신을
둘러싼 갖은 추문에 시달렸고, 네덜란드 미술 시장의 취향이 급속도로 보수화되면서 자신에게
선뜻 모델이 되겠다고 나서는 이가 거의 사라지는 말년을 보내야 했다. 평생 대중과 평단의 몰이해
속에서 살았던 고흐는 자신을 보살펴준 이들에 대한 작은 선물용 그림이나 초상화를 그렸을 뿐,
대부분은 자신의 모습을 캔버스에 담으며 ‘인물화 연습’을 해야 했다.이 작품은 고흐가 고갱과
지내던 아를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스스로 자신의 정신적 문제를 치유하기 위해 택한 생레미의
생폴드모졸 요양병원에서 그린 그림이다. 생레미 시절 고흐는 그림 때문에 미친 것인지, 아니면
그림을 그려서 덜 미칠 수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그야말로 광적으로 작업에 매달렸다. 그 시절
고흐가 그린 자화상만도 여섯 점에 이른다.작품 속 그는 평소와 다르게 단정한 정장 차림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의도적으로 병세를 강조하기 위해 더할 나위 없이 창백하고 수척한 얼굴로
자신을 표현했다. 잔뜩 찌푸린 미간과 긴장감 가득한 눈동자는 잦은 발작에 시달린 자신의
불안한 정서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흐는 머리카락과 수염을 제외한 대부분을 파랑과 초록의
구불구불한 선으로 마감했다. 덕분에 오렌지색의 수염과 머리카락이 훨씬 더 강조되어 보인다.
물결치는 듯한, 혹은 소용돌이 같은 이 곡선은 생레미에 머물던 시기부터 자주 그의 화면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고흐 스스로 렘브란트의 자화상들을 두고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화상들은 일종의 자기고백과 같은 거야.”라고 말 한 것처럼, 고흐의 〈자화상〉은 그저
겉모습을 충실히 묘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부에서 솟구치는 발작 같은 그 무엇, 즉 불안
하고 고통스러운 자신의 정신세계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