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Portugal) 알코바사(Alcobaça)
알코바사(Alcobaça)
알코바사(Alcobaça)는 서부 해안가 지방의 지자체 도시로 과거 에스트레마두라
(Estremadura)주에 포함되었던 도시이다. 오비두스에서 북쪽으로 40 km 에
위치하고 있으며 알코아(Alcoa)강과 바사(Baça)강의 계곡을 따라 발달해 있어
도시의 이름이 유래되었다. 2011년 기준 지자체 전체 인구는 408.14 km2의
면적에 56,693 명이고 도시 만의 인구는 15,800 명이다. 알코바사는 포르투갈의
초대 왕인 아폰수 엔리케스(Afonso Henriques)가 1147년 무어인들로부터
산타렝(Santarem)을 수복한 이후에 괄목할 만한 발전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공화국 광장(Praça da República)-
** 알코바사의 중심 광장.
** 벼룩시장 장마당은 알코바사 수도원 앞 광장에 펼처져 있다.
** 입구 앞 테라스에는 조형물들이 서 있다 .
** 알코바사 수도원(Mosteiro de Alcobaça )은 웅장하고 거대한 수도원 건물군(群)으로 포르투갈의 초기 고딕 건축의
좋은 예이다. 포르투갈의 중부지방에서 십자군 활동으로 무어인들을 축출시킨 아폰수 엔리케스(Afonso Henriques)왕이
새로운 왕조의 권위를 보이기 위해 1153년 웅대한 성당을 짓기 시작한 것이다. 수도원은 성당이 완성된 후 완공되었으며
정문 양쪽에는 성 베네딕토 와 성 베르나드 상이 안치되어 있다. 수도사가 되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생활은 척박하다.
**알코바사 수도원의 정식명칭은 '알코바사의 성모 마리아 수도원(Mosteiro de Santa Maria de Alcobaça)'이다.
알코바사 수도원의 성당과 수도원은 코임브라(Coimbra)의 산타 크루스(Santa Cruz) 수도원과 함께 포르투갈에
건설된 첫 고딕 양식 건축물들 중의 하나로 포르투갈의 중세 수도원 중 가장 중요한 곳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수도원의 예술적,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1989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
**76년이 걸려 1223년 교회가 완공 되었을 당시 포르투갈에서 가장 큰 교회였으며. 왕조는 건축 작업을 계속하여
60년이 더 걸려 디니스(Dinis)왕은 수도원 본 건물을 완성하였고 1262년 드디어 수도원이 봉헌되었다.
**제대의 양쪽에는 페드로(Pedro/ 남쪽,오른편)와 이네스 드 카스트로(Ines de Castro/북쪽, 왼편)의 석관이 있다.
** 이 방에는 역대의 왕들의 석상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 성 베르나르드(St. Bernard ; 우) 와 교황 알렉산더 3세(Alexander III ; 좌)가 대관식을 하고 있다.
** 포르투갈의 역사와 주요 사건들이 그려져 있다.
** 왼편으로부터 에마누엘(Emanuel)/ 요안니스(Ioannis)/ 알폰수(Alfonso).
** 석상에는 '요안니스' '알폰스' 등 주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 성인들의 이름 또는 역대 교황들의 이름이 석상 기단에 보인다.
** 왼편 : 성 유지니우스(Eugenius3세/교황) 오른편 ; 성 베르나르두스(Bernardus /ABBS).
**4 각 뿔 형태의 거대한 굴뚝이 인상적이다. 수도원이 세워진 후 알코바사는 부흥하기
시작하여 수도원 자체의 인력만도 999명에 달할 정도로 방대한 규모를 자랑 하였다.
**알코바사 수도원에는 페드로 왕과 이네스 왕비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가 서려있다. 카스티야(Castilla) 공주와
정략적으로 결혼한 페드로 왕자는 따라온 공주의 시녀인 이네스(Inês)에게 마음이 있었는데 출산 중에 죽어버린
공주를 대신하여 이네스와의 사이에서 3명의 자녀를 두게 되지만 부왕의 명령으로 이네스는 암살 당하게 된다.
부왕이 승하하고 왕좌에 오른 페드로는 암살에 가담한 자들에 대하여 무자비 하고 피 비린내 나는 복수를 한다.
**이네스 암살에 가담한 자들을 잡아들여 채찍질하고, 산채로 심장을 뽑아내어 살해했다. 잔혹왕(Peter I The Cruel)이란
별칭이 이때 생겼다. 복수를 마친 페드로는 이네스의 시체를 꺼내어 대관식을 치러 정식으로 여왕의 지위를 하사 한다.
대관식에서 시체 앞에 무릎을 꿇고 부패한 그녀의 손에 키쓰를 하도록 명했다고 한다.
바탈야(Batalha)
바탈야는 포르투갈의 중부 지역 레이리아(Leiria)주의 지자체 도시이다. 도시 이름 Batalha는
영어의 Battle(전투)을 의미한다. 2011년 기준 전체의 인구는 15,805명이고 면적은 103.42 km2 이다.
마을의 현지 주민은 약 7,500명이 주거하고 있다. 이 마을은 1383년 8월 14일 알류바로타(Aljubarrota)
전투에서 포르투갈이 승리 함으로서 성모마리아께 감사를 드리기 위해 주앙 1세(D. João I)왕에 의해
승리의 산타 마리아 수도원(Monastery of Santa Maria da Vitória)의 건설과 함께 마을도 건설되었다.
**승리의 산타 마리아 수도원(Mosteiro de Santa Maria da Vitória)은 바탈야 수도원(Mosteiro Batalha)으로
더 널리 알려진 센트루 지방 레이리아 현 바탈야 시에 위치한 도미니코회 수도원이다.
**1385년 알주바로타 전투에서 카스티아 왕국에게 승리한 것에 대해 성모 마리아께 감사를 표하기 위해
주앙 1세의 명에 따라 건설을 시작하였으며 15세기 포르투갈 왕국의 아비스 家의 가족 묘지 역할을 하였다.
바탈야 수도원은 또한 마누엘 양식과 혼재된 포르투갈의 후기 고딕 건축의 가장 좋은 독창적인 예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 2, 성 도밍고(S.Domingos). 1. 십자가에 못 밖힌 그리스도(Cristo crucificado).
3. 성 프란치스코(S.Francisco). 4. 성녀 요안나 공주(Santa Joana Princesa)
** 성당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채플의 주인공 부부의 석관이 안치되어 있다. 8각의 이 원형건물(Rotunda)은
영국의 건축가 우게트(Huguet)에 의해 지어졌는데 1402년 부터 그가 사망하던 1438년까지 바탈랴 수도원 건축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는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캔터베리 대성당 건축에도 참여한 바 있다.
1400년경에 지어진 고딕 양식의 회랑이며 특히 포르투갈 특유의 정교한 조각 형식인 마누엘린(Manueline) 장식으로 유명하다.
**수도원의 주 성당인 승리의 성모 성당(The Church of Our Lady of Victory)동쪽에 붙어있다.
건축공사가 상당히 진척 되다가 중단되어 지붕이 얹혀있지 않은 상태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위의 사진에서 오른편의 본당에 붙어 있는 왼편의 지붕 없는 건물이 미완성 채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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