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은평구 북한산 진관사(北漢山 津寬寺)
서울특별시 은평구 북한산(北漢山)에 있는 고려전기 제8대 현종이 승려 진관대사를
위해 창건한 사찰.진관사(津寬寺)의 역사 북한산(삼각산) 서쪽 기슭에 있는 조계종
소속 고려시대의 고찰로,불암사, 삼막사, 보개산 심원사와 함께 조선시대에는 한양
근교의 4대 사찰 중 하나였다.진관사가 창건된 배경은 고려 현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진관조사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지은 절이라고 전해진다.
고려 목종(제7대)이 아들이 없자 태조의 아들 욱(대량원군)을 세자로 책봉했는데
경종(제5대)의 대비였던 천추태후가 욱을 살해하려고 했다.욱은 진관조사의 도움
으로 진관사에 숨어 목숨을 건졌고 욱은 목종에 이어 현종으로 등극하여 1011년에
진관사를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 6.25전쟁이 일어나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64년 이후 복원되었다.진관사
법전으로는 대웅전, 명부전, 홍제루, 동정각(動靜閣),나한전, 독성전, 칠성각, 나가원
(那迦院), 객실 등의 건물이 있다.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안에 석가모니 불상과 미륵보살상, 제화갈라보살상을 모셨고,비로자나 후불탱화와
석가모니 후불탱화,노사나 후불탱화를 봉안하였다.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장보살과 도명존자상, 시왕상, 동자상 등이 있으며 지장
보살상 뒤편에 지장 후불탱화가 있다.명부전 옆의 독성전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독성상과 독성탱화, 산신탱화를 모셨다.
삼존불상과 십육나한상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사 영산전(靈山殿)에 봉안할 목적으로
1884년에 제작한 십육나한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46호. 무명 바탕에 채색.
각 폭 세로 106~110㎝, 가로 155~183㎝.십육나한은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과
(阿羅漢果)에 이르렀으나 미륵(彌勒)부처가 올 때까지 열반(涅槃)에 들기를 미룬 채
이 땅에 남아 불법을 수호하고 중생을 이롭게 하는 소임을 맡은 16명의 불제자이다.
나한은 십육나한, 십팔나한, 오백나한으로 무리를 이루어 신앙화 되는데, 그 중
십육나한은 나한의 성격이 가장 집약된 구성이라 할 수 있다.십육나한의 구성과 성격은
『불설대아라한난제밀다라소설법주기(佛說大阿羅漢難堤密多羅所說法住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이 그림은 경전에 기술된 십육나한의 특성이 잘 반영되어 있다.
진관사 십육나한도는 근대기에 주요 불교 후원자로 부상한 상궁(尙宮)들의 시주로
제작된 작품이다.그림에 화사(畵師)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1884년에 함께
제작·봉안된 제석천도(帝釋天圖)와 명부사자도(冥府使者圖)의 기록을 참고할 때
화승(畵僧) 동호당 진철(東昊堂 震徹), 금화당 기형(錦華堂 機炯), 축연(竺衍) 등이
주축이 되어 그린 것으로 보인다.이들은 근대기에 서울·경기와 강원도에서 왕성한
활동을 했던 대표적인 화승들이다.특히 축연은 음영법을 적극적으로 구사하던 화사
인데 그의 개성이 이 그림에도 잘 반영되어 있다. 진관사 십육나한도는 나한도 중
근대기 서울 지역에서 제작된 드문 사례로 당시 이 지역의 나한도 경향을 파악하고
화사들의 화풍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상궁들이 발원한 작품이라는
점도 의의가 크다.
진관사 칠성각 (津寬寺 七星閣) 진관사 칠성각은 진관사 나한전 옆에 건립되어 있는
목조와즙 건물로 여러 번 보수가 이루어졌으나 창건 당시의 원형을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다.건물은 외벌대 기단을 마련하여 건립한 정면 3칸, 측면 1칸의 소규모 건물이다.
초석 위에 사각형 기둥을 올린 민도리 형식으로 창호 앞에는 디딤돌을 마련하여 문지방을
쉽게 오르내리도록 했다.지붕은 맞배지붕이며, 정면 처마부는 겹처마이고, 후면 처마부는
홑처마로 구성되었다.건물 양측면에는 화방벽(火防壁)이 설치되어 있다.건물 내부는
안쪽 벽에 불단을 마련하여 칠성도와 석불좌상, 명호스님의 영정을 봉안하였다.천정은
우물천정이고 2개의 굵직한 대들보가 대공을 사이에 두고 육중한 지붕의 하중을 받치고
있는 도리를 받치고 있다.진관사는 1900년대 초 중창 불사가 있었으나 6.25전쟁으로
나한전, 독성각,칠성각만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이처럼 칠성각은 6.25전쟁 당시에도
소실되지 않고 온전하게 남은 건물로 융희 1년(1907)건립된 것으로 확인 되었다.
칠성각은 불교에 흡수된 민간신앙인 칠성신(七星神)을 모시고 있는데,북두칠성은
재물과 재능을 주고,수명을 관장하며, 비를 내려 풍년을 들게 하는 신으로 민간에서
널리 신앙되었다.이와 같이 칠성각은 여러 민간신앙적인 요소를 흡수하여 불교화
시킨 통불교적인 한국불교의 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물이다.
진관사 소장 태극기 및 독립신문류 (津寬寺 所藏 太極旗 및 獨立新聞類)2009년
5월 진관사 칠성각의 해체·복원 작업을 할 때 발견된 유물이다.태극기 1점과
《독립신문>.《신대한》·《조선독립신문》·《자유신종보》·〈경고문〉
19점으로 구성된다.태극기는 1919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각종 신문과 문건은
1919년 6월에서 12월 사이에 발행되었다.누가 사찰에 이 유물들을 감추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사찰 측은 진관사와 인연이 깊은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인 백초월
(1878~1944)이 연관되어 있다고 추정한다.태극기는 가로 8cm, 세로 70cm 크기이며,
바탕은 면직물이다.일제강점기의 태극기 중 사찰에서는 처음 발견된 태극기로,
독립의지를 굳게 세우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일장기를 개조하여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4괘와 태극 문양을 갖추었는데,건괘 쪽 모서리 부분은 삭았고 중앙에
구멍도 여러 개 나 있다.재통틀로 박음질한 붉은 원 안에 음(陰) 부분을 청색이
아니라 먹물로 추정되는 흑색 안료로 그려 태극을 표현하였다.태극기에 싸인 채
발견된 신문과 문건에는 3·1운동 이후의 상황을 알리는 기사와 함께 태극기
관련 기사 및 자료들이 실려 있다.
단재 신채호가 상하이에서 창간한 신문인《신대한》은 제1~3호가 각 1점씩 발견되었다.
제2호에는 개천절에 강화도 모처에서 태극기를 게양하였으나 일본군에게 압수당하고
수모를 겪은 내용이 실려 있다. 3·1운동 직후부터 국내에서 발행한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은 제32호, 제40~42호,호외가 각 1점씩 발견되었다. 신문 제호란에는
태극기가 그려져 있《자유신종보》는 3·1운동 후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자들이 발행한
것으로 알려진 신문으로,제4호·제7호 각 1점, 제12호 4점이 발견되었다.조선 노동회
경성단이 발표한 〈경고문〉은 3·1운동 후 시작된 자치운동 등에 대하여 강력 경고하고
독립운동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글이다.말미에 진관사 발견 태극기와 동일한 모양의
태극기 그림이 실려 있다.1919년 3·1운동 이후 국내 독립운동 상황과 태극기 변천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2010년 2월 25일 등록문화재
제458호로 지정되었다.
~ 진관사 독성도(津寬寺 獨聖圖) ~서울특별시 은평구2002년 3월 15일 서울특별시의
문화재자료 제12호로 지정되었다.고려 현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진관조사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지은 절로서 조선시대에는 수륙재의 근본 도량이었다.
현재 대웅전과 명부전을 비롯해 홍제루, 동정각, 나한전, 독성각, 칠성각,나가원, 객실
등의 건물이 있다.
독성도(獨聖圖)는 가로로 긴 화면에 민화풍(民畵風)의 산수를 배경으로 독성(獨聖)과
시자(侍者), 동자(童子) 등을 그린 것으로서 가로가 2m가 넘는 대작에 속한다.이 불화는
19세기말~20세기초 경기도 일원에서 활약하던 화승(畵僧) 경선당(慶船堂) 응택
(應釋)이 그린 독성도(獨聖圖)로서 홍순모(洪淳謨)와 상궁(尙宮) 이씨(李氏)의
시주에 의해 1907년에 제작된 것이다.이 그림은 주황색이 주조(主調)을 이루는
가운데 감청색과 녹색이 간색(間色)으로 쓰였는데,전체적으로 채색이 탁하게 되어
있다.화면의 중앙에는 늙은 비구가 정면을 향하여 앉아 있고 그 좌우에 시자(侍者)와
동자(童子)가 시립(侍立)하고 있다.늙은 비구(比丘)는 부처의 제자로 16나한(羅漢)
중의 한 분인 나반존자(那畔尊者) (빈두로존자, 賓頭盧尊者)로서 선홍색과 청색으로
채색된 옷을 입고,왼손에는 석장(錫杖)을 들고,한 무릎을 괸 채 앉아 있는 백발이
성성한 노비구(老比丘)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그림의 배경은 나반존자(那畔尊者)가
거주하던 남인도(南印度)의 천태산(天台山)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화면의
향좌측 가장자리에 그려진 청록색의 소나무와 산악 등은 민화(民畵)에서 자주 묘사되던
모티프이다.1907년에 제작된 작품이지만,전체적으로 필선이 유려하며 작품성이 있는
예이다.보존상태도 양호하다.
진관사에서 북한산 정상방향인 동쪽으로 이어진 계곡을 진관사계곡이라고 부르는데
암반이 잘 발달되어 있다.암반은 경사가 급하고 작은 폭포들이 계곡을 따라 이어진다.
진관사계곡을 따라 산길을 오르면 북한산 사모바위와 비봉에 이르게 되고 이어 향로
봉과 승가봉이 가까이 있다.주변은 북한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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